글로벌 머니의 단말마에 맥루한을 생각하다

by PSB(Jean)


"이것은 약속이야, 미국이 세상에 지불을 보증한 약속. 약속이 깨지면 그냥 휴지조각에 불과하지." - 두바이 e-Gold 대표, 1달러 지폐를 꺼내보이며

고대 지중해의 무역을 제패한 페니키아인들에게는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해상무역제국에 화폐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맥루한은 그 이유가 페니키아인의 무역경로가 지중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배는 어차피 물 위에 뜨기에 적재량에 제한이 없고 그만큼 물물교환과 구상무역에 의지할 수 있어 굳이 화폐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중동의 낙타무역상들은 화폐가 절실했습니다. 낙타의 등을 부러뜨릴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육상교역량에는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이에 따라 가벼우면서도 교역의 가치를 늘릴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화폐가 고안됐다는 것이지요.

이후 화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화폐는 현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상징논리를 획득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라고 봅니다. e-Gold의 대표가 지적한 것처럼 달러는 약속에 불과합니다. 약속이란 깨지면 아무 대책이 없게 마련이지요.

어린 시절 지폐를 보며 저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 지폐를 들고가면 누구나 내게 값진 물건을 건내 주고 기꺼이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그 돈을 내게서 받은 사람은 또 다른 누구에게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지요.

보험회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품은 바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 전쟁이 발발해 나라 전체가 초토화된다면 도대체 누가 내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현실의 답은 '재보험사'이지요. 로이드같은 글로벌 재보험사가 바로 이런 이유로 탄생했습니다. 어찌보면 보험회사는 역사상 가장 먼저 세계화를 통해 위험분산을 시도한 업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 규모의 경제가 무너지는 재앙 앞에서는 지구 규모의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지요.

그러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지구 규모의 재난이 닥친다면 나의 손해는 어떤 보험사가 보상해 주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모럴 해저드는 사실 방아쇠에 불과하지요.

마치 보험사들이 재보험사에 보험을 드는 것처럼 글로벌 금융사들은 지구 규모의 경제라면 최악의 재앙에서도 자신을 구해 줄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금융공학으로 생산된 갖가지 파생상품과 이를 보증해주는 위험 회피상품들은 바로 지구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 하에 지금까지 팔린 것이지요.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는 이런 가능성을 '블랙 스완'이라고 규정합니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이 사실은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에너지라는 것이지요. 금융공학은 지구가 한 날 한 시에 망할 일은 지구에 까만 백조가 발견되는 것 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가정하고 이에 의지해 갖가지 위험분산 상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까만 백조는 결국 호주에서 발견되고 맙니다.

세계화로 지구의 금융 네트워크를 씨줄 날줄로 엮어 놓고 "그래도 지구가 망하는 날은 없을거야"라며 서로를 안심시키고 있을 때 바로 이 세계화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가 공멸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대의 페니키아인들이 해상무역에 의지했기에 이들의 영향력이나 위험이 지중해 내부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금융도 위험의 파생네트워크를 '로컬'하게 가두어두었다면 인류는 지금 이런 '글로벌'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겠지요.

이번 사태가 잠잠해지면 인류는 머니와 세계화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 다시 돌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현물 가치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독자적인 논리로 돌아가는 '미친 머니', 미국 주택구입자가 저지른 모럴해저드를 서울의 김씨, 이씨, 장씨가 뒤집어쓰는 이 황당한 독박의 상황...

아무도 이런 미친 사태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디지털 머니는 여전히 유통되고 글로벌 컴퓨터 네트워크도 왕성하게 번성하겠지만 아마도 전혀 다른 로컬화된 규제구조가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엮었지만 언어의 장벽 탓에 한국의 대다수 네티즌은 여전히 한국 인터넷의 테두리에 갇혀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인류는 지금 머니와 세계화에 대해 매우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